등촌중학교 앞에 있던 등촌리가 오늘날의 등촌동이 되었다. (옛날 등촌리는 현재 등촌1동, 백석리는 등촌2동이 되었음)
화곡동(禾谷洞)
땅이 기름져 골짜기 사이마다 벼가 잘되므로 벼가 익어가는 골짜기마을이란 뜻의 화곡동이라 불리워졌다. (옛날 초록동은 화곡본동, 곰달래길의 시원지는 화곡1동, 봉제산 남쪽줄기 아래는 화곡2동, 감촌마을은 화곡3동, 능꼴마을은 화곡4동, 박장마을은 화곡5동, 역말마을은 화곡6동, 새까지마을은 화곡7동, 더부리 마을은 화곡8동이 되었음)
가양동(加陽洞)
가양동은 가마동과 고양리가 합쳐지면서 불리워진 이름이다. 가마동은 지금의 CJ공장부지 언저리에 삼밭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고양리는 양천초등학교 근방으로 궁산의 남쪽 볕이 잘 드는 곳이라는 뜻이다. 조선 조 양천현의 행정중심지로서 양천현아가 있었으며, 태종12년,(1411년) 창건된 양천향교가 지금도 남아있다. 우리구에서 문화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으며, 우리구 역사의 중심지이다., (양천현아와 향교가 있던 곳은 가양2동, 탑산 아래 공암리는 가양2동, 출웅동이가 있던 늪지는 가양3동이 되었음)
마곡동(麻谷洞)
이곳에서 삼(麻)이 많이 났기에 마곡동이라 하였다. 원래 고고마진 나루터가 있었던 어촌이였다.
발산동(鉢山洞)
수명산(파려산, 발산)이 마치 밥주발을 엎어놓은 형국이라하여 '발산'이라 불리웠으며 산 안쪽마을을 내발산동, 산 바깥마을을 외발산동이라 하였다.
공항동(空港洞)
원래 송정리였으나 김포비행장이 들어서면서 공항동이라 하였다.
방화동(傍花洞)
사시사철 꽃향기가 퍼지는 개화산 옆에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방화동이라는 동명이 생겼다. (옛날 능리가 방화1동, 정곡리, 차현리가 방화3동, 공항동 옆 논밭이 방화2동이 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