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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남

김응남
  • 제주목사로 재임 당시 선정을 배풀었다는 기록이 되어있다. 다사헌, 대사간, 부제학, 이조참판, 한성부판윤을 거쳤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 겸 부체찰사가 되어 병력을 통솔하였으며 그 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임명되어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전 후의 정국을 수습하였다.
명종 1년(1546년) ~ 선조 31년(1598년)
  • 본관 원주(原州), 호 두암(斗巖), 별칭 자 중숙(重淑), 시호 충정(忠靖)
  •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 홍문과(弘文館) 정자(正字)에 등용되었다. 1583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서 병조판서 이이(李珥)를 논핵(論劾)한 삼사(三司)의 송응개(宋應漑) 허봉(許) 등이 도리어 유배당할 때 그들과 일당이라는 혐의를 받고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좌천되었으나, 선정(善政)을 베풀어 기민(飢民)응 구휼하고 2년 뒤 우승지(右承旨)를 제수받았다. 1591년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와 한성부판윤으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으로 평안도로 피란하는 선조를 호종하였으며, 1594년 우의정, 1595년에 좌의정이 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는 안무사(按撫使)로 영남에 내려가 풍기(豊基)에서 병을 얻어 서울에 돌아온 뒤 관직을 사퇴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책록되어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양천현 출생으로 화곡 4동 능골에 묘가 있었으나 1972년 3월 30만단지 조성 때 묘를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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