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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

독립운동가, 김도연(1894 ~ 1967)
개국·독립운동가, 김도연
상산 김도연(1894~1967) 상산(常山)김도연 선생은 1894년 강서구 염창동 (당시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염창리)의 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독립운동가로, 또 정치가로 평생을 조국에 헌신하였다. 1913년 일본 긴조중학 졸업, 1919년 게이오대학 이재학부를 수료하였다. 동경 유학 시절 『조선청년독립단 』을 조직하여 백관수 등 동경유학생들과 함께 1919년 2월 8일 동경조선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2·8독립선언을하여 옥고를 치렀다.
  • 그 뒤 미국에 유학하여 1927년에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석사학위를, 1931년에 아메리 칸 대학에서 경제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선생은 미국에서도 3.1정신과 민족정신을 드높이고 한민족의 대동단결을 호소하기 위해 3.1신문을 발간하는 등 끊임없이 조국 광복을 위해 힘썼다. 귀국하여 1932년 연희전문 강사로 있다가 1934년 조선흥업주식회사 사장이 되었으나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함흥형무소에서 2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총무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1946년 2월 미군정하에서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 의원에 위촉되었으며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당선되었다(민선).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재정경제분과위원장에 선출되었고 8월초대 재무부장관에 취임하였다. 이후 3대, 4대, 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60년 5대 민의원에 당선된 후 민의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4.19혁명이후 내각책임제하에서 국무총리후보로 먼저 지명되었으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장면이 총리가 되었다. 1963년 11월 6대 민중당 전국구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1965년 8월 한·일 협정 국회비준을 반대 하며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선생은 6·8부정선거 무효화를 위하여 26시간 단식투쟁을 하다 지병으로 1967년 7월 19일 숨졌다. 저서로《나의 인생백서(자서전)》《한국농촌경제 (박사학위 논문)》등이 있다. 선생을 기리기 위해 향교길 사거리에서 서측 유수지 방면 으로 가는 길에 2·8기념공원을 조성하고 유묵인「사귀정직(事貴正直)」을 세웠다.
  • 김도연 선생 기념비
    <상산 김도연 선생 동상 및 유묵비>
  • 2·8 독립선언서
    <2·8 독립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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