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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강서 인물

김말손 장군
종2품 무관
  • 본관(原州), 중종때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도병마절도사를 지냄. 용감하고 호방한 무장으로 염창동의 “귀신바위 설화”의 주인공이며 영벽정 정자를 짓고 강서구에 윈주김씨의 뿌리를 심어 그후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게 되었다.
김준룡(金俊龍)
~인조 19년(1641년)
  • 조선조 무신, 본관 원주, 인조14(1636)전라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병자호란때 용인 광교산에서 청태조의 사위인 적장 백양고라를 위시하여 많은 적병을 사살했다. 능곡(화곡4동 신곡초등학교 옆)에 묘와 신도비가 있었다. 또한 이곳에는 첨지 金斗南, 동중추 金敬文, 우의정 金德猿, 참판 金朝潤의 묘가 있었다.
김덕원(金德遠)
인조 12년(1634년) ~ 숙종 30년(1704년)
  • 본관(原州) 호(休谷) - 1634(인조 12)~1704(숙종 30)
    병조참판, 한성부판윤, 경기감사, 예조판사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숙종 20년(1694)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제주에 유배, 숙종 22년에 풀려나와 陽川에서 별세하였다. 강서구에 현존하는 유일한 보물인 김덕원공 출토의복은 1972년 3월 김덕원공 묘에서 총 53종 68점이 나왔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복식으로 조선중기 상류사회의 복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국가 문화재:보물 제672호>
    (김말손 장군의 후손으로 양천현에서 태어났고, 화곡4동 능골에 묘가 있었으나 1972년 3월 30만단지 택지개발로 이장하였다.)
김수동(金壽童)
세조 3년(1457년) ~ 선조 26년(1593년)
  • 조선조 문신, 본관 안동, 중종1년 (1506) 중종반정에 참여 정국공신으로 좌의정이 되었으며 중종10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당곡(신정동)에 영의정 김수동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김천일(金千鎰)
중종 32년(1537년) ~ 선조 26년(1593년)
  • 본관(彦陽) 호(健薺)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전라창의사 임진난 때 나주에서 고경명, 박광옥, 최경희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수원성을 거쳐 강화로 들어갔다. 그는 왜적에게 점령된 서울에 결사대를 잠입시켜 싸웠고, 한강변의 여러 적진을 급습하는 등 크게 활략함. (이때 가양동 궁산의 양천고성지에 주둔하여 변이중, 우성진 등과 더불어 권율 장군을 도와 행주산성 전투에 협공하였다.) 또한 퇴각하는 왜군을 쫓아 진주까지 내려갔고, 진주성 싸움에서 화살이 떨어지고 창이 부러져 백병전을 치루던 중 성이 함락되고 부상까지 당하여 아들과 함께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변이중(邊以中)
명종 1년(1546년) ~ 광해군 3년(1611년)
  • 본관(黃州) 호(望齋)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전라소모사 임진왜란 때 가산을 털어 火車 300량을 제작, 권율 장군에게 보냄으로써 “행주대첩”의 승리를 가져오게 했고, 직접 양천 의병들을 거느리고 가양동 궁산의 양천고성지에서 행주산성 전투에 협공하여 큰공을 세웠다. 말년에는 함안군수로 재직하였다.
송인명(宋寅明)
숙종 15년(1689년) ~ 영조 22년(1746년)
  • 본관(礪山) 호(藏密軒) 개화사(현 약사사)에서 공부하고 만년에 이 절을 크게 중수하였다. 영조의 탕평책을 적극 호응하였으며 우참찬, 호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에 올랐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붕당의 폐해를 경계하고 기지와 정략이 풍부하였다.
심정(沈貞)
성종 2년(1471년) ~ 중종 26년(1531년)
  • 조선조 문신, 본관 풍산, 호는 소요정(消遙亭), 중종반정에 참여 정국공신이 됨. 중종13년(1518) 한성판윤 이듬해에 형조판서로 임명됐으나 신진사류인 조광조 일파의 탄핵으로 파직, 이어 정국공신도 삭탈되자 이에 원한을 품고 남곤, 홍경주등과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류들을 숙청했다. 중종22년(1527) 우의정, 좌의정에 올랐다가 옥사(獄死)에 연루 김안로(金安老)의 탄핵으로 江西에 유배, 사사됐다.
    방학3동 개화산에 좌의정 심정(心貞)의 묘와 직제학 심사손의 묘와 신도비, 부제학 심사순의 묘, 우의정을 지내고 청백리로 녹선된 심수경의 묘와 자신이 지은 비가 있으며 그 외에도 풍산심씨 묘 60여기가 있다.
심사순(沈思順)
~중종 26년(1531년)
  • 조선조 문신, 본관 풍산, 심정의 아들, 중종12년(1517)별시문과에 3등으로 형 사손과 함께 급제, 부제학을 거쳐 사가독서했다. 중종26년(1531)종루궤서사건에 그필적이 의심스럽다 하여 가택을 수색, 등남산 詩가 발견됨에 중종이 크게 노하여 국문에 장사했다. 개화산에 묘가 있다.
심사손(沈思遜)
성조 24년(1493년) ~ 중종23년(1528년)
  • 본관(豊山) 심정(沈貞)의 子
    조선 전기의 문신. 중종8년(1523) 사마시에 합격. 151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528년 서북방면의 야인들의 준동하자 만포진첨절제사가 되어 변방방어에 정력을 쏟던중 야인의 기습을 받아 살해되었다(당시 나이 26세. 현재 방화3동 삼정중학교 뒷산에 묘소가 있음).
심수경(沈守慶)
중종11년(1516년) ~ 선조32년(1599년)
  • 본관(豊山) 호(廳天堂) 심사손의 아들이다.
    경사도관찰사, 대사헌, 평안도관찰사, 대사성, 형조참판,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병조판서,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나이가 많아 임금을 보필하지 못하고 충청도 내포로 피난 중 충청도 의병을 총괄하는 건의대장이 되었다. 50년이 넘는 벼슬살이를 했으나 근검하며 청빈하고 성품이 온화하여 남의 원한을 사지 않으므로 청백리에 올랐다.(방화3동 개화산 입구에 묘서가 있음)
엄집(嚴輯)
인조 13년(1635년) ~ 숙종 36년(1710년)
  • 본관(寧越) 호(晩海)
    전라도관찰사, 대사간, 도승지,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지냄. 장희빈을 논죄하였고 기개가 있고 매우 청렴하여 세인의 칭송이 자자했다.
우성전(禹性傳)
중종 37년(1542년) ~ 선조26년(1593년)
  • 본관(丹) 호(淵庵) 의병대장
    사헌부장령, 사옹원정, 응교, 의정부사인 등을 거쳤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화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김천일과 함께 왜군의 해상보급로를 차단했으며 권율을 도와 행주대첩에 참가 했다. 후에 이조판서로 추서되었다. 대사성 우성진은 허엽(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의 부친)의 사위가 된다.
유담후(柳譚厚)
인조 1년(1623년) ~ 숙종 12년(1686년)
  • 본관(文化) 호(潔淸齋)
    세자시강원사서, 사헌부지평, 울산부사, 순창군수,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울산부사 때 탐학한 토호를 다스리고 어려운 송사를 잘 처결하였다 한다.
    (내발산동에서 자랐음)
유상운(柳尙運)
인조 14년(1636년) ~ 숙종 33년(1707년)
  • 본관(文化) 호(約제) 시호(忠簡公)
    평안도관찰사, 호조판서, 이조판서, 형조판서, 위의정, 좌의정, 영의정에 오름(양천구 신정동에서 자랐음)
유봉휘(柳鳳輝)
효종 10년(1659년) ~ 영조 3년(1727년)
  • 본관(文化) 호(晩菴) 영의정 유상운 아들
    신정동에서 태어나 정시문과에 급제, 당시 양민의 큰 부담이었던 軍布의 폐지를 시정할 것을 건의. 경종 때 소론의 영수로서 대리청정의 부당함을 극간하여 철회케 하고 노론을 실각시킴. 우의정 좌의정에 오름. 신임사화의 주동자로 몰려 귀양간 유배지 경흥에서 사망하였다.
이명달
광해군 때
  • 본관(德水) 월촌리(신월동)에 묘소가 있었다.
    벼슬은 부사(종 3품)에 이름. “이치”(헌납:정5품)의 손자임 광해군 5년 계축년(1613)에 모후를 폐할 의론이 일어날적에 “엄후”등과 더불어 칼을 가지고 대궐아래 엎드려 이위경 등 3인의 역적을 죽이라고 임금께 아뢰였다.
이덕영(李德英)
명종 21년(1566년) ~ 인조 23년(1654년)
  • 본관(韓山) 호(竹泉) 이수정 정자 주인, 인조반정때 忠義를 인정받다. 광해군 때 응교, 동부승지, 승지, 대사간, 좌부승지, 부제학, 이조참의, 우승지, 병조참판, 도승지, 나주목사, 전라감사, 황해감사 등을 지냈다. 인조반정 후 광해군을 죽이지 말 것을 주장했으며 한성부판윤이 되어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웠다. 병자호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염창동 강병에 이수정을 지었음)
이유(李蹂)
  • 본관(全州) 호(笑窩)
    동복현감을 지냈으며 학문과 시가에 능하였다. 말년에 가양동 궁산에 악양루를 지어놓고 “江山主人”이라 했다. (궁산의 악양루는 나중에 소악루로 바뀜)
정희계(鄭熙啓)
충목왕 4년(1348년) ~ 태조 5년(1396년)
  • 고려말 조선초 문신, 본관 慶州, 시호 良景
    공민왕때 과거에 합격. 이성계를 도와 국초창업의 1등공신으로 판한성부사에 오름. 태조능인 건원릉(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내) 신도비에 정희계의 개국공로를 잊지 말라는 열성조수교가 있으며 뒷날 정희계의 자손에게 특별한 은전을 성조는 잊지말라는 기록도 있다.태조5년에 49세로 병사함으로써 태조께서 우의정 계림군에 추증하셨으며 예조에 명하여 양천현 남면 재궁동(竹洞:신정3동)에 예장하였다. 정희계公과 정경부인 두분의 분묘가 현재 양천구 신정3동에 전해오고 있다.
허형손(許亨孫)
세종 9년(1427년) ~ 성종 8년(1477년)
  • 조선조 무신, 본관 陽川, 세조6년(1460)야인정벌때 위장으로 출전, 전공을 세움, 의주목사,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지중추부사에 이름. 역촌(화곡6동 강서구청앞)에 판서 허형손의 묘와 비갈이 있었다.
허종(許琮)
세종 16년(1434년) ~ 성종 25년(1494년)
  • 조선조 문신, 본관 陽川, 세조13년(1467) 이시애난이 일어나자 함길도 절도사로 난을 평정, 적개공신1등으로 양천군에 피봉됨. 성종22년(1491) 영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여진족이 북변을 괴롭히자 북정도원수로 군대를 이끌고 적의 본거지를 소탕, 개선하고 우의정에 올랐다. 철저한 배불론자이며 청백리였다.
허침(許琛)
세종 26년(1444년) ~ 연산군 11년(1505년)
  • 조선조 문신, 본관 陽川, 연산국 10년(1504)우의정,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앞서 성종이 윤비를 폐하려 할 때 이를 반대했기로 갑자사화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허굉(許宏)
성종 2년(1471년) ~ 중종 24년(1529년)
  • 조선조 문신, 본관 陽川, 허침의 아들, 중종15년(1520) 조윤손이 여연, 무창의 야인을 정벌할 때 그를 도와 큰 공을 세워 예조판서에 오르고 중종23년(1528) 우찬성에 승진했다. 이때 서쪽변방에 야인들이 침범이 잦아 순변사가 되어 평정하고 개선,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했다.
황숙(黃璹)
  • 조선조 문신, 본관 陽川, 허침의 아들, 중종15년(1520) 조윤손이 여연, 무창의 야인을 정벌할 때 그를 도와 큰 공을 세워 예조판서에 오르고 중종23년(1528) 우찬성에 승진했다. 이때 서쪽변방에 야인들이 침범이 잦아 순변사가 되어 평정하고 개선,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했다.
김득남(金得男)
선조 35년(1601년) ~ 인조 15년(1637년)
  • 본관(光山), 자(先述), 호(梅竹軒)
    조선중기의 무신으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원종공신에 올랐다. 1636년 병자호란때 강화의 철곶진첨사로 임명되어 수비하였으며, 이듬해 적이 강화에서 물러나자 스스로 모집한 병사 30여명을 거느리고 부평 계양산아래 굴포까지 진격하여 적 수백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조선의 여인을 구출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어 도망가는 적을 계속 추격하여 싸우던 중 적의 화살을 맞고 순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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