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양2동 앞 한강여울을 투금탄이라 한다. 고려말기에 이조년. 이억년 형제가 젊었을 적에 길을 가다가 우연히 금덩이를 주워 둘이 나눠가졌다. 형제는 공암나루를 건너고자 나룻배를 탔는데 아우가 갑자기 금덩이를 한강 물에 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형이 깜짝놀라 무슨짓이냐고 물었다. 이에 동생은 "제가 어찌 황금 귀한줄을 모르겠습니까. 평소에 두터웠던 우리형제의 우애가 아닙니까? 그런데 황금 을 주운 뒤에 만약 형이 없었던들 나 혼자서 금덩이 두개를 다 가질수 있었을텐데......하는 사특한 마음이 들어 형제의 우애에 금이 가려고 해서 액물인 황금을 강물에 던져 버린 것 입니다." 했다. 이에 형님도 네말이 옳다고 하면서 자신이 가졌던 금덩이 마저 물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곰달래 사랑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곰달래길에는 다음과 같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전해온다. 아직 한강유역이 백제 땅일때 이곳에 서로 사랑하는 음소와 음월이라는 남녀가 살고 있었다. 신라가 백제를 위협하자 전국에 군대소집 명령이 내려졌고 이곳에 살던 청년 "음소"도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다. 청년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말했다. 동산에 둥근달이 떠오르면 백제가 이긴 것이니 자신을 기다릴 것이고, 칠흑같은 밤이 되면 백제가 싸움에 진 것이니 다른사람을 찾아 떠나라는 말을 한후 전쟁터로 떠났다. 몇날이나 계속되던 신라와 백제의 싸움이 끝날무렵 동산에서 작은 조각달이 떠오르다가 이내 커다란 둥근달이 되었다. 여인은 기뻐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먹구름이 지나가면서 캄캄한 밤이 되었다. 이에 놀란 여인은 산위로 올라가 아래로 몸을 굴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구름이 지나가고 다시 환하고 커다란 달이 나왔을 때, 밤새 먼 길을 달려온 청년이 도착하였으나 이미 여인의 목숨은 끊어진 뒤였다. 산꼭대기 달이 떠오르는 곳에 자신의 손으로 여인을 묻고 돌아서며 청년은 "이제 끝이로구나, 거친 세상에 음월이의 목숨이 끝났구나" 라고 하며 슬피 울었다고 한다. 이 울부짓던 말이 고음월(古音月)이라고 한다. 고(古)는 옛글로 거칠다. 끝났다.(古)라는 뜻인데 바로 "음월이의 목숨이 끝났다"라는 말이며 그뒤 그마을 지명이 고음월리(古音月里)가 되었고 오늘날 우리말로 풀어서 "곰달래 마을"이 된 것이라 한다.
도당재샘물과 신목(神木)이야기
우장산 배드민턴장 계곡아래에는 동네주민들의 갈증을 씻어주는 약수터가 있다. 우장산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이곳 샘물을 떠서 올릴 정도로 깨끗하고 정갈한 물맛을 자랑했다고 한다. 지금도 도당재샘물이라 불리었던 이 약수터물로 동네 어른들이 술을 빚어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6 25전 도당재샘물 바로 위에 수백년 묵은 소나무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신령스럽게 여기며 소중히 섬겼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소나무가 비바람에 쓰러졌는데 주민 한사람이 이 소나무를 가져다 불을 땠다. 다음날 이사람의 목이 돌아가고 몸을 움직일수 없는 일이 생겼다. 마을사람들은 산신의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산신께 용서를 빌고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고 하는데 소나무의 신령스러움을 나타내는 전설이다.
귀신바위와 김말손 장군
"영벽정"과 관련해 전해오는 전설
염창에는 '두미암'이라는 바위산과 '영벽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영벽정'과 관련해 전해오는 전설이 귀신바위와 김말손 장군 이야기다. 옛날 한적한 시골 마을이던 염창동에 갑자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구름한점 없이 맑은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사방이 깜깜해지고 거센 바람이 나무와 지붕을 순식간에 날려버렸다. 동네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에 놀란 사람들은 집밖으로 뛰어 나왔다가 더욱 기막힌 광경을 보았다. 집채만한 바위가 마을을 향해서 쏜살같이 날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바위덩어리는 마을 가까이 오더니 하늘을 빙빙 돌다가 '꽝'하며 내려앉았다. 바위가 내려앉자 나무가 없던 민둥바위산에 나무가 무성해지고 사나운 짐승떼가 나타나 울부짖는 괴상한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귀신붙은 이 바위가 마을에 큰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 생각하고 귀신을 달래기 위해 7일동안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 그러자 캄캄했던 하늘이 전처럼 환해지고 울부짖던 짐승들도 점차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 마을에 또다시 재앙이 찾아왔다. 귀신바위가 마을을 향해 굴러내려와서 지나가던 한 농부를 깔아 죽이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날 이후 마을 사람들은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집 밖 출입을 삼가게 되었고 마을 분위기도 점점 스산해져 갔다. 한편 사람죽인 귀신바위 이야기는 이웃동네로 계속 퍼졌고 마침내 한양에 사는 김말손 장군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김 장군은 활을 잘 쏘고 용감하다고 소문이 난 훌륭한 장군이었다. 소문을 들은 김 장군은 무기를 준비해서 염창동에 있는 귀신바위를 찾아갔다. "마을 사람을 괴롭히는 이 요상한 귀신아, 어서 나와 내 활을 받아라" 장군이 커다란 소리로 귀신바위 앞에서 소리를 쳤다. 그러자 갑자기 바위가 빛을 내면서 장군에게 달려들었다. 장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굴러오는 바위를 향해 활을 쏘았다. 장군에게 굴러오던 바위는 쏜살같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지 못하고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 떨어져 죽었다. 결국 김 장군의 용감한 행동으로 바위에 붙은 귀신은 죽었고 마을도 다시 평화를 찾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귀신을 잡아준 장군을 기리기 위해 귀신바위 옆에 정자를 지었다. 이 정자가 바로 '영벽정'이었다.
조옥동과 초록동자
지극한 효성과 애국심의 전설
옛날 화곡본동 화곡초등학교 뒷부근에 조옥동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조옥동(照玉洞)은 이 마을의 산 중턱에 있는 하얀돌이 옥처럼 비친다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후에는 초록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마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병활동을 한 초록동자 이야기가 전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양동 뒷산인 궁산에 전라창의사 김천일 장군, 전라소모사 변이중 장군, 강화 의병장 우성전 장군 등이 인천과 강화, 김포, 통진, 양천의 의병들을 지휘하여 한강을 건너 권율장군의 행주대첩에 참가하여 수많은 왜군을 물리치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때 양천의 조옥동(또는 초록동)에 사는 어느 농부가 의병으로 나가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는데 그의 아들이 죽은 아버지의 갑옷을 입고 행주대첩에서 왜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 어린아이를 초록동자라고 부르며 지극한 효성과 애국심을 자손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능말 세우물 전설
4개의 우물의 전설
옛날 능말(지금의 방화3동)에는 4개의 우물이 있었다. 그중 세개는 삼각형을 이루어 시할머니, 시어머니, 며느리 3대를 나타내었고 나머지 한개는 조금 떨어진 옆 마을에 있었다. 원래 한 집안의 중심이 되는 세명의 여자가 사이가 좋으면 집안이 편안하고 번창하지만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세개의 우물은 한곳에서 물을 퍼올리면 다른쪽 물이 줄어들고, 또 세곳의 물을 마시면 아기를 못 낳고 집안이 망한다는 소문이 돌아 마을사람들은 세 우물을 메워버렸다. 그래서 능말에는 한개의 우물만 남게 되었는데 이 우물의 물맛이 굉장히 달고 시원했다고 한다. 또한 누구든지 우물물을 마시고 '물맛 좋다'는 칭찬을 하고 가야지 물만마시고 그냥 가면 물의 양이 갑자기 줄어들게 되었다고 한다.
이문(里門), 경문(慶門)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
조선조 7대 임금인 세조가 보위에 오르기 전의 일이다. 어느날 수양대군은 무술을 연마하기 위해 말을 타고 통진 쪽으로 다녀오다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발산동 광명리에서 하루를 쉬어가게 되었다. 원래 이 마을에는 효자와 효부가 많이 살고 있었는데 수양대군은 하룻밤을 묵으면서 이곳 사람들의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과 행동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날이 밝아 도성으로 돌아간 수양대군은 마을 사람들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마을에 기념문을 세워주고, 축하하는 경문(慶門)도 세워주었다고 한다.
"증미(曾米)마을" 유래
염창동 전설
삼남지방에서 조세로 거둔 양곡을 싣고 한양으로 올라오는 조운선이 염창리 앞 한강 여울목에서 가끔 침몰하는 일이 있었다. 염창리 앞 강폭은 좁은데다가 물살이 빨라 상류에서 흘러 내린 토사가 쌓이거나 괘여 강바닥이 고르지 못했기에 배가 자칫 침몰하는 것이다. 배가 침몰하면 부근의 마을사람들이 물속으로 들어가 양곡을 건지게 되었기에 이 마을을 쌀을 건진다는 뜻의 증미마을이라 하였다.
화곡동 지명유래
화곡5동 이야기
지금의 화곡5동은 옛날 쉬울고개로서 길손이 역말 너머 염창동으로 가는 도중 이 고개에서 쉬어 간다는 고개였다. 어는 양천현감이 어느해 가을날 이 고개에서 저멀리 신월동 쪽을 바라보니 골짜기 사이 아래에 누렇게 잘익은 벼가 비단같이 펼쳐져 있고 공같이 둥근불체를 굴리면 촘촘한 벼이삭위를 굴러 땅에 떨어지지 않고 저 아래까지 굴러 갈것만 같은 모습을 보고 "골짜기 사이의 기름진 땅에 벼가 잘 되는 마을"이라고 하여 이곳 지명을 화곡리라고 하게 되었다고 한다.
화곡동 진흙은 옹기그릇 원료
화곡7동 이야기
화곡동 일대는 원래 진흙땅으로 도기를 만드는 원료로는 최상급으로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후 한강상류의 도기공장들이 염창동에 이전해 와서 이곳 진흙으로 도기(옹기그릇)를 만들게 되었다. 이곳 화곡7동 논밭을 가진 땅주인들은 진흙을 팔아서 돈을 벌고 기름진 진흙땅을 무상으로 갈아엎어주니 농사가 잘되어 돈을 벌고 까치산 산기슭의 흙을 파냄으로 자연히 밭이 논으로 바뀌어지게 되니 땅값이 올라가고 대다수의 주민들에게는 고통만 안겨주는 진흙덕택에 부자가 된 땅주인이 많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