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의정 허종의 14대손으로 대사헌 허황의 손자이며 허응의 아들이며,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선조 5년(1572년) 춘당대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선조 25년(1592년) 공주 목사로 재임 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강을 굳게 수비하는 한편, 승병, 의병과 함께 청주탈환에 전공을 세워 호서, 호남지역을 안전하게 하였다.
명종 3년(1548년) ~ 광해군 10년(1618년)
본관 양천(陽川), 자 공신(公愼), 호 부훤(負暄)
선조 26년(1593)에는 충청도 관찰사로서 권율의 서울수복작전에 가담하였다. 즉, 권율은 한강 건너 행주산성에서 진을 치고, 전라 병사 선거이는 수원 광교산에, 전라 소모사 변이중은 양천에, 충주 감사 허욱은 파주와 양천을 연결하는 전선엥 각각 포진하여 남하하는 명나라 원병과 호응하여 서울에 버티고 있는 왜적을 일거에 부수고 수복을 기한 것이다. 그러나 권율로부터 내포가 풍년임에도 군량을 변통치 못한다고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러나 곧 이조의 요청과 유성룡의 추진으로 형조참의에 임명되었으며, 난후 나라 전체가 큰 기근에 지자 청량사로 명나라에 건너가 산동지방의 곡식을 얻어와 백성을 진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후 한성부 판윤, 호조, 이조 판서를 지내고 선조 39년(1606) 광해군 즉위년(1608)에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 했던 유영경이 잎라라 하여 파직되어 서호(양천현)의 월촌리(지금의 목2동)에서 10년간 살면서 시사를 말하지 않았다. 이어 광해군 8년(1616)에 신경희의 옥사에 연루되어 원주에 귀양가서 그곳에서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는 말이 적고 일에 임함에 있어 신중하였으며, 효성에 우애 또한 지극하였다. 인조반정후에 관직이 복구되었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시호는 정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