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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이미지 조선 최고의 명의, 구암 허준(1537-1615)
서울 강서구에서 태어난 허준은 궁중에서 내의원의 의관으로 벼슬을 시작해 국왕의 병을 진료하는 수의로써 활약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전통의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하여 한의학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으며, 이외에도 전염병 관련 서적을 비롯하여 여러 의서들을 출간하는 등 백성들의 질병퇴치에 힘을 기울였다.
동의보감이미지 동의보감
『동의보감』은 선조 30년(1597) 임금의 건강을 돌보는 어의였던 허준이 선조의 명을 받아 실용성과 과학성을 바탕으로 당시까지의 동양의학의 모든 지식을 집대성해 체계적으로 서술한 의서로, 광해군 2년(1610)에 완성하고 광해군 5년(1613)에 초판을 간행하였다. 이는 총 25권 25책으로 목활자로 발행하였다.
『동의보감』은 과학적 입장에서 당시의 모든 의학 지식을 정리하였는데, 국내외 180여 종의 의서를 참고하여 내용이 풍부하다. 1,212종의 약재에 대한 자료와 4,497종의 처방을 수록하고 있는데, 특히 약재들의 이름이 한글로 수록 되어 있어 국어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도 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 의학을 ‘동의’라고 칭하며 독자적인 전통을 강조한 허준의 『동의보감』은 중국, 일본, 대만 등지에서 수십 차례 간행되어 동아시아 의학 발달에 크게 이바지했다. 또 세계 최초로 예방 의학과 국가적 보건정책에 대한 관념을 구축했다. 이러한 의학적 · 역사적 ·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7월 보건의학서로는 최초로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1676-1759)
정선이미지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은 수백여 점의 작품을 남긴 조선시대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는 1740년 12월 양천현령(지금의 강서구청장)으로 부임하여 만 5년동안 지금의 강서구 일대를
    중심으로 한 한강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려 강서지역을 진경산수의 산실로 만들었다.
정선은 우리나라의 실재하는 풍경을 직접 여행을 통해 가장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전달해낼 수 있는 진경산수화풍을 확립시켜 한국 회화사의 새로운 전통을 수립한 인물이다. 그의 진경산수화는 양천현령으로 근무하였을 때 원숙한 경지에 올라, 진경시의 대가인 이병연과 시화를 교환하며 《경교명승첩》과 같은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이때 그렸던 그림으로는 양천현아, 종해청조, 개화사, 이수정, 소악후월, 목멱조돈 등이 있다.
강서를 주제로 한 정선의 작품들
양천현아 : 영조 16년(1740) 당시 양천현아 모습.현재 이곳은 강서구 가양동 239 일대이다.
이수정(二水亭) : 강서구 염창동 도당산(都堂山·지금의 증산) 상봉에 있던 정자다.
설평기려(雪坪騎驢) : 겸재가 나귀 타고 떠났던 곳은 지금의 강서구 가양동 239 부근의 양천 현아 입구이고, 마주 보이는 우장산은 내발산동 우장공원에 해당한다. 종해청조(宗海聽潮) : 그림의 제목은‘양천현 동헌인 종해헌에 앉아서 조수 밀리는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다.
목멱조돈(木覓朝暾) : 목멱산은 서울 남산의 다른 이름이다. 한강 하류 양천현아 즉, 지금의 가양동쪽에서 보면 목멱산 동쪽의 낮은 봉우리가 엇갈려 나와 먼저 보이고 서쪽의 높은 봉우리가 그 뒤로 서기 때문에 오른쪽 봉우리가 높은데도 왼쪽 봉우리가 높게 보인다.
빙천부신(氷遷負薪) : 눈 쌓인 강변을 배경으로 땔나무를 지어 나르는 현민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추운 겨울 날 나무장사 나가는 현민들을 보고 지방관으로서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던 정경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김도연
김도연이미지
상산(常山) 김도연 선생은 1894년 강서구 염창동(당시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염창리)의 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독립운동가로, 또 정치가로 평생을 조국에 헌신하였다. 1913년 일본 긴조중학 졸업,
    1919년 게이오대학 이재학부를 수료하였다. 동경 유학 시절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여 백관수등
    동경유학생들과 함께 1919년 2월 8일 동경조선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2ㆍ8독립
    선언을하여 2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김도연선생기념비 그 뒤 미국에 유학하여 1927년에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석사학위를, 1931년에 아메리칸 대학에서 경제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선생은 미국에서도 3.1정신과 민족정신을 드높이고 한민족의 대동단결을 호소하기 위해 3.1신문을 발간하는 등 끊임없이 조국 광복을 위해 힘썼다. 귀국하여 1932년 연희전문 강사로 있다가 1934년 조선흥업주식회사 사장이 되었으나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함흥형무소에서 2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총무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1946년 2월 미군정하에서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 의원에 위촉되었으며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당선되었다(민선).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재정경제분과위원장에 선출되었고 8월초대 재무부장관에 취임하였다. 이후 3대, 4대, 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60년 5대 민의원에 당선된 후 민의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4.19혁명이후 내각책임제하에서 국무총리후보로 먼저 지명되었으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장면이 총리가 되었다. 1963년 11월 6대 민중당 전국구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1965년 8월 한·일 협정 국회비준을 반대 하며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선생은 6ㆍ8부정선거 무효화를 위하여 26시간 단식투쟁을 하다 지병으로 1967년 7월 19일 숨졌다. 저서로《나의 인생백서(자서전)》《한국농촌경제 (박사학위 논문)》등이 있다. 선생을 기리기 위해 향교길 사거리에서 서측 유수지 방면 으로 가는 길에 2ㆍ8기념공원을 조성하고 유묵인「사귀정직(事貴正直)」을 세웠다. 2.8독립선언서
화가, 김종태(1906 ~ 1935)
화가 김종태선생이 태어나 그림을 그렸던 곳
회산(繪山)김종태는 1906년 4월 8일 김포(지금의 강서구 마곡동)에서 태어나 1925년 19세에 김포민전공립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경성사법학교를 졸업하고 주료보통학교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선생은 기질이 괴팍하고 자유분방했다고 한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
    독특한 표현방식을 체득하였다. 당시 서양 화단에 팽배해 있던 서구 조형방식을 받아들이고 모방하는
    데에 급급했던 상황에서 과감히 벗어나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이루었다. 아울러 미술가의 현실의식과
    향토미를 강조하였으며, 서양화의 표현양식을 전통회화와 접목하여 독특한 조형세계를 구축하였다.
작품_노란저고리 20대에 화단에 등단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1926년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이라 함)에 첫 입선을 한 후선전을 중심으로 많은 상을 받았다. 1927년에서 1933년 사이에 1932년 한해만 거르고 여섯 차례 특선을 하여 1935년 한국인 작가로는 최고라 할 수 있는 추천작가가 되었다. 선생은 살아있는 동안 두 번 개인전을 열었는데 평양에서 개인전을 하던 중 갑자기 장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떴다. 선생은 혈혈단신으로 오로지 그림만 그리다가 29세의 짧은 생을 마친 것이다. 선생은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여 작품 수는 100여 점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이나(선전에 출품한 작품은 모두 22점이다) 대부분의 작품은 행방을 알 길이 없으며 남아있는 작품은 겨우 4점뿐이다.
김응남
김응남
제주목사로 재임 당시 선정을 베풀었다는 기족이 되어 있다. 다사헌 대사간 부제학 이조참판 한성부판윤을 거쳤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겸 부체찰사가 되어 병력을 통솔하였으며 그후, 우의정을거쳐 좌의정에 임명되어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전후의 정국을 수습하였다
1546(명종 1년)~1598(선조 31년) 본관(原州) 호(斗巖) 별칭 자 중숙(重叔), 시호 충정(忠靖)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 홍문과(弘文館) 정자(正字)에 등용되었다. 1583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서 병조판서 이이(李珥)를 논핵(論劾)한 삼사(三司)의 송응개(宋應漑) 허봉(許) 등이 도리어 유배당할 때 그들과 일당이라는 혐의를 받고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좌천되었으나, 선정(善政)을 베풀어 기민(飢民)응 구휼하고 2년 뒤 우승지(右承旨)를 제수받았다. 1591년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와 한성부판윤으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으로 평안도로 피란하는 선조를 호종하였으며, 1594년 우의정, 1595년에 좌의정이 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는 안무사(按撫使)로 영남에 내려가 풍기(豊基)에서 병을 얻어 서울에 돌아온 뒤 관직을 사퇴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책록되어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양천현 출생으로 화곡 4동 능골에 묘가 있었으나 1972년 3월 30만단지 조성때 묘를 이장하였다.)

심수경
심수경
경사도관찰사 대사헌 평안도 관찰사 대사성 형조참판 한성부판을 형조판서 병조판서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충청도 내포로 피난중 충청도 의병을 총괄하는 건의 대장이 되었다. 50년이 넘는 벼슬 살이를 했으나 근검하며 청빈하고 성품이 온화하여 남의 원한을 사지 않으므로 청백리에 올랐다.
1546(명종 11년)~1599(선조 32년)본관 풍산(豊山), 호 청천당(聽天堂), 별칭 자 희안(希安)

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직제학을 거쳐 경기도 관찰사로 잇을 때 중종의 능을 천장(遷葬)하게 되자 대여(大與)가 한강을 건너는 선창을 설치하지 않은 죄로 파직되었으나, 후에 대사헌, 팔도의 관찰사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1590년 우의정에, 그리고 기로소(耆로소)에 들어갔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체찰사가 되어 의병모집에 힘썼다.(방화3동 개화산 입구에 묘소가 있다)

허욱
허욱
우의정 허종의 14대손으로 대사헌 허황의 손자이며 허응의 아들이며,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선조 5년(1572) 춘당대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선조 25년(1592) 공주 목사로 재임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강을 굳게 수비하는 한편, 승병, 의병과 함께 청주탈환에 전공을 세워 호서, 호남지역을 안전하게 하였다.
1548(명종 3년)~1618(광해군 10년)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공신(公愼), 호는 부훤(負暄)

선조 26년(1593)에는 충청도 관찰사로서 권율의 서울수복작전에 가담하였다. 즉, 권율은 한강 건너 행주산성에서 진을 치고, 전라 병사 선거이는 수원 광교산에, 전라 소모사 변이중은 양천에, 충주 감사 허욱은 파주와 양천을 연결하는 전선엥 각각 포진하여 남하하는 명나라 원병과 호응하여 서울에 버티고 있는 왜적을 일거에 부수고 수복을 기한 것이다. 그러나 권율로부터 내포가 풍년임에도 군량을 변통치 못한다고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러나 곧 이조의 요청과 유성룡의 추진으로 형조참의에 임명되었으며, 난후 나라 전체가 큰 기근에 지자 청량사로 명나라에 건너가 산동지방의 곡식을 얻어와 백성을 진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후 한성부 판윤, 호조, 이조 판서를 지내고 선조 39년(1606) 광해군 즉위년(1608)에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 했던 유영경이 잎라라 하여 파직되어 서호(양천현)의 월촌리(지금의 목2동)에서 10년간 살면서 시사를 말하지 않았다. 이어 광해군 8년(1616)에 신경희의 옥사에 연루되어 원주에 귀양가서 그곳에서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는 말이 적고 일에 임함에 있어 신중하였으며, 효성에 우애 또한 지극하였다. 인조반정후에 관직이 복구되었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시호는 정목이다.

김말손 - 종2품무관

본관(原州), 중종때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도병마절도사를 지냄. 용감하고 호방한 무장으로 염창동의 “귀신바위 설화”의 주인공이며 영벽정 정자를 짓고 강서구에 윈주김씨의 뿌리를 심어 그후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게 되었다.

김준룡 - ~ 인존 19년(1641)

조선조 무신, 본관 원주, 인조14(1636)전라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병자호란때 용인 광교산에서 청태조의 사위인 적장 백양고라를 위시하여 많은 적병을 사살했다. 능곡(화곡4동 신곡초등학교 옆)에 묘와 신도비가 있었다. 또한 이곳에는 첨지 金斗南, 동중추 金敬文, 우의정 金德猿, 참판 金朝潤의 묘가 있었다.

김덕원 - 1634(인조 12) ~ 1704(숙종 30)

본관(原州) 호(休谷) - 1634(인조 12)~1704(숙종 30)
병조참판, 한성부판윤, 경기감사, 예조판사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숙종 20년(1694)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제주에 유배, 숙종 22년에 풀려나와 陽川에서 별세하였다. 강서구에 현존하는 유일한 보물인 김덕원공 출토의복은 1972년 3월 김덕원공 묘에서 총 53종 68점이 나왔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복식으로 조선중기 상류사회의 복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국가 문화재:보물 제672호>
(김말손 장군의 후손으로 양천현에서 태어났고, 화곡4동 능골에 묘가 있었으나 1972년 3월 30만단지 택지개발로 이장하였다.)

김수동 - 세조 3년(1457) ~ 중종7년(1512)

조선조 문신, 본관 안동, 중종1년 (1506) 중종반정에 참여 정국공신으로 좌의정이 되었으며 중종10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당곡(신정동)에 영의정 김수동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김천일 - 중종 32년(1537) ~ 선조 26년(1593)

본관(彦陽) 호(健薺)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전라창의사 임진난 때 나주에서 고경명, 박광옥, 최경희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수원성을 거쳐 강화로 들어갔다. 그는 왜적에게 점령된 서울에 결사대를 잠입시켜 싸웠고, 한강변의 여러 적진을 급습하는 등 크게 활략함. (이때 가양동 궁산의 양천고성지에 주둔하여 변이중, 우성진 등과 더불어 권율 장군을 도와 행주산성 전투에 협공하였다.) 또한 퇴각하는 왜군을 쫓아 진주까지 내려갔고, 진주성 싸움에서 화살이 떨어지고 창이 부러져 백병전을 치루던 중 성이 함락되고 부상까지 당하여 아들과 함께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변이중 - 1546(명종 1)~1611(광해군 3)

본관(黃州) 호(望齋)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전라소모사 임진왜란 때 가산을 털어 火車 300량을 제작, 권율 장군에게 보냄으로써 “행주대첩”의 승리를 가져오게 했고, 직접 양천 의병들을 거느리고 가양동 궁산의 양천고성지에서 행주산성 전투에 협공하여 큰공을 세웠다. 말년에는 함안군수로 재직하였다.

송인명 - 1689(숙종 15)~1746(영조 22)

본관(礪山) 호(藏密軒) 개화사(현 약사사)에서 공부하고 만년에 이 절을 크게 중수하였다. 영조의 탕평책을 적극 호응하였으며 우참찬, 호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에 올랐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붕당의 폐해를 경계하고 기지와 정략이 풍부하였다.

심정 - 1471(성종 2)~1531(중종 26)

조선조 문신, 본관 풍산, 호는 소요정(消遙亭), 중종반정에 참여 정국공신이 됨. 중종13년(1518) 한성판윤 이듬해에 형조판서로 임명됐으나 신진사류인 조광조 일파의 탄핵으로 파직, 이어 정국공신도 삭탈되자 이에 원한을 품고 남곤, 홍경주등과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류들을 숙청했다. 중종22년(1527) 우의정, 좌의정에 올랐다가 옥사(獄死)에 연루 김안로(金安老)의 탄핵으로 江西에 유배, 사사됐다.
방학3동 개화산에 좌의정 심정(心貞)의 묘와 직제학 심사손의 묘와 신도비, 부제학 심사순의 묘, 우의정을 지내고 청백리로 녹선된 심수경의 묘와 자신이 지은 비가 있으며 그 외에도 풍산심씨 묘 60여기가 있다.

심사순 - ~중종26년(1531)

조선조 문신, 본관 풍산, 심정의 아들, 중종12년(1517)별시문과에 3등으로 형 사손과 함께 급제, 부제학을 거쳐 사가독서했다. 중종26년(1531)종루궤서사건에 그필적이 의심스럽다 하여 가택을 수색, 등남산 詩가 발견됨에 중종이 크게 노하여 국문에 장사했다. 개화산에 묘가 있다.

심사손 - 성종 24(1493년)~중종 23(1528년)

본관(豊山) 심정(沈貞)의 子
조선 전기의 문신. 중종8년(1523) 사마시에 합격. 151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528년 서북방면의 야인들의 준동하자 만포진첨절제사가 되어 변방방어에 정력을 쏟던중 야인의 기습을 받아 살해되었다(당시 나이 26세. 현재 방화3동 삼정중학교 뒷산에 묘소가 있음).

심수경 - 중종 11(1516)~1599년(선조 32)

본관(豊山) 호(廳天堂) 심사손의 아들이다.
경사도관찰사, 대사헌, 평안도관찰사, 대사성, 형조참판,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병조판서,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나이가 많아 임금을 보필하지 못하고 충청도 내포로 피난 중 충청도 의병을 총괄하는 건의대장이 되었다. 50년이 넘는 벼슬살이를 했으나 근검하며 청빈하고 성품이 온화하여 남의 원한을 사지 않으므로 청백리에 올랐다.(방화3동 개화산 입구에 묘서가 있음)

엄집 - 인조 13(1635년)~숙종 36(1710년)

본관(寧越) 호(晩海)
전라도관찰사, 대사간, 도승지,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지냄. 장희빈을 논죄하였고 기개가 있고 매우 청렴하여 세인의 칭송이 자자했다.

우성전 - 중종 37(1542년)~선조 26(1593년)

본관(丹) 호(淵庵) 의병대장
사헌부장령, 사옹원정, 응교, 의정부사인 등을 거쳤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화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김천일과 함께 왜군의 해상보급로를 차단했으며 권율을 도와 행주대첩에 참가 했다. 후에 이조판서로 추서되었다. 대사성 우성진은 허엽(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의 부친)의 사위가 된다.

유담후 - 인조 1(1623년)~숙종 12(1686년)

본관(文化) 호(潔淸齋)
세자시강원사서, 사헌부지평, 울산부사, 순창군수,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울산부사 때 탐학한 토호를 다스리고 어려운 송사를 잘 처결하였다 한다. (내발산동에서 자랐음)

유상운 - 인조 14(1636년)~숙종 33(1707년)

본관(文化) 호(約제) 시호(忠簡公)
평안도관찰사, 호조판서, 이조판서, 형조판서, 위의정, 좌의정, 영의정에 오름(양천구 신정동에서 자랐음)

유봉휘 - 효종10(1659년)~영조 3(1727년)

본관(文化) 호(晩菴) 영의정 유상운 아들
신정동에서 태어나 정시문과에 급제, 당시 양민의 큰 부담이었던 軍布의 폐지를 시정할 것을 건의. 경종 때 소론의 영수로서 대리청정의 부당함을 극간하여 철회케 하고 노론을 실각시킴. 우의정 좌의정에 오름. 신임사화의 주동자로 몰려 귀양간 유배지 경흥에서 사망하였다.

이명달 - 광해군때

본관(德水) 월촌리(신월동)에 묘소가 있었다.
벼슬은 부사(종 3품)에 이름. “이치”(헌납:정5품)의 손자임 광해군 5년 계축년(1613)에 모후를 폐할 의론이 일어날적에 “엄후”등과 더불어 칼을 가지고 대궐아래 엎드려 이위경 등 3인의 역적을 죽이라고 임금께 아뢰였다.

이덕영 - 명종 21(1566년)~인조 23(1654년)

본관(韓山) 호(竹泉) 이수정 정자 주인, 인조반정때 忠義를 인정받다. 광해군 때 응교, 동부승지, 승지, 대사간, 좌부승지, 부제학, 이조참의, 우승지, 병조참판, 도승지, 나주목사, 전라감사, 황해감사 등을 지냈다. 인조반정 후 광해군을 죽이지 말 것을 주장했으며 한성부판윤이 되어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웠다. 병자호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염창동 강병에 이수정을 지었음)

이유

본관(全州) 호(笑窩)
동복현감을 지냈으며 학문과 시가에 능하였다. 말년에 가양동 궁산에 악양루를 지어놓고 “江山主人”이라 했다. (궁산의 악양루는 나중에 소악루로 바뀜)

정희계 - 충목왕 4(1348년)~태조 5(1396년)

고려말 조선초 문신, 본관 慶州, 시호 良景
공민왕때 과거에 합격. 이성계를 도와 국초창업의 1등공신으로 판한성부사에 오름. 태조능인 건원릉(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내) 신도비에 정희계의 개국공로를 잊지 말라는 열성조수교가 있으며 뒷날 정희계의 자손에게 특별한 은전을 성조는 잊지말라는 기록도 있다.태조5년에 49세로 병사함으로써 태조께서 우의정 계림군에 추증하셨으며 예조에 명하여 양천현 남면 재궁동(竹洞:신정3동)에 예장하였다. 정희계公과 정경부인 두분의 분묘가 현재 양천구 신정3동에 전해오고 있다.

허형손 - 세종 9(1427년)~성종 8(1477년)

조선조 무신, 본관 陽川, 세조6년(1460)야인정벌때 위장으로 출전, 전공을 세움, 의주목사,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지중추부사에 이름. 역촌(화곡6동 강서구청앞)에 판서 허형손의 묘와 비갈이 있었다.

허종 - 세종 16(1434년)~성종 25(1494년)

조선조 문신, 본관 陽川, 세조13년(1467) 이시애난이 일어나자 함길도 절도사로 난을 평정, 적개공신1등으로 양천군에 피봉됨. 성종22년(1491) 영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여진족이 북변을 괴롭히자 북정도원수로 군대를 이끌고 적의 본거지를 소탕, 개선하고 우의정에 올랐다. 철저한 배불론자이며 청백리였다.

허침 - 세종 26(1444년)~연산군 11(1505년)

조선조 문신, 본관 陽川, 연산국 10년(1504)우의정,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앞서 성종이 윤비를 폐하려 할 때 이를 반대했기로 갑자사화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허광 - 성종 2(1471년)~중종 24(1529년)

조선조 문신, 본관 陽川, 허침의 아들, 중종15년(1520) 조윤손이 여연, 무창의 야인을 정벌할 때 그를 도와 큰 공을 세워 예조판서에 오르고 중종23년(1528) 우찬성에 승진했다. 이때 서쪽변방에 야인들이 침범이 잦아 순변사가 되어 평정하고 개선,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했다.

황숙

조선조 문신, 본관 陽川, 허침의 아들, 중종15년(1520) 조윤손이 여연, 무창의 야인을 정벌할 때 그를 도와 큰 공을 세워 예조판서에 오르고 중종23년(1528) 우찬성에 승진했다. 이때 서쪽변방에 야인들이 침범이 잦아 순변사가 되어 평정하고 개선,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했다.

김득남 - 선조35년(1601)~인조15년(1637)

본관(光山), 자(先述), 호(梅竹軒)
조선중기의 무신으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원종공신에 올랐다. 1636년 병자호란때 강화의 철곶진첨사로 임명되어 수비하였으며, 이듬해 적이 강화에서 물러나자 스스로 모집한 병사 30여명을 거느리고 부평 계양산아래 굴포까지 진격하여 적 수백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조선의 여인을 구출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어 도망가는 적을 계속 추격하여 싸우던 중 적의 화살을 맞고 순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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