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한강 하구를 지키던 군사요새
조선 시대에 양천은 한강과 육로를 통해 외세의 침입에 대항하는 최후의 저지선 역할을 담당했던 수륙 양면으로 전략적으로 요충지였다. 지리적으로 소읍이었지만 현감보다 높은 직급의 현령을 두어 관리하게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해발 74m의 궁산에는 성벽을 쌓았던 흔적으로 적심석과 성의 돌이 남아 있다.
양천고성지(陽川古城地)는 삼국 시대 이래로 행주산성(사적 56호), 파주의 오두산성(사적 351호) 등과 더불어 한강 하구를 지키던 중요한 군사요새였다. 이곳은 가양동 ‘양천향교지’ 뒤편인 궁산에 위치한 넓이가 약 29,370m2의 옛 성터로서 『동국여지승람』, 『대동여지도』 등 문헌 자료에 등장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도 석성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문헌에 기록된 자료에 따르면 양천향교의 뒤편인 성산(지금의 궁산)에 고성(古城)이 있는데 그 둘레는 726척 (약 218m)이고 지금은 성으로서 기능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조선 중종(1531년) 때는 이미 폐성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략 축성된 시기는 삼국 시대로 추정된다. 서울시와 강서구에서 2008년부터 발굴을 시작하여 3차 발굴 때, 석축 13층의 성벽과 유물이 발견되어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임진왜란(1592년) 당시에 권율 장군의 지휘를 받아 전라 소모사 변이중 장군, 강화 의병장 우성전 장군 등이 의병을 이끌고 이 성에 유진했다가 한강을 건너 행주대첩에 참가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군이 주둔했다. 6.25 사변 때는 미군과 국군이 차례로 주둔함으로써 산 정상은 심하게 변형되어 있다. 그러나 1994년에는 산 정상 동편에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소악루(小岳樓)가 아름답게 복원되어 강서 구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