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조선 정국공신 심정공과 그 후손의 묘역
조선 11대 중종 임금 때 우의정 및 정국공신인 “심정공”과 그 자손인 심사손공, 심사순공 및 손자인 조선 청백리 심수경공 등 풍산심씨 가문의 분묘 약 50여 기가 있다. 그중 문화유산적 가치가 있는 4분의 분묘와 그에 딸린 묘비, 상석 등을 국가유산으로 지정 보호하게 된 것이다. 이곳 풍산심씨 묘역 일대는 심씨 집성촌으로 심씨마을이라고 불렀다.
한편 이곳은 능골·능리라 하여 고려 때의 왕릉지와 인조의 생부인 원종의 능 천장지로 선정되기도 하여 그 이름이 생기기도 했다. 그런데 이 개화산을 주산으로 한 명당자리에 풍산 심씨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정국공신 심정공은 연산군 12년에 반정하여 연산군을 추방하고 중종을 옹립했다. 그러나 신진사류인 조광조 일파의 탄핵으로 파직되고 정국공신직도 삭탈되었다. 이에 원한을 품고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류들을 숙청했다. 황해도 관찰사, 개성유수, 형조판서, 예조판서, 한성판윤,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을 등을 지냈다.
그는 1527년(중종 22년)에 우의정·좌의정에 올랐다. 이때 개화산 근처에 소요정(逍遙亭)을 짓고 일가를 이루며 살았다. 그 뒤에 복성군(福城君)의 옥사에 연루되어 김안로의 탄핵으로 강서(江西)에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61세의 나이로 사사되어 양천 서쪽 개화리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1534년에 합장되었다.
심사손공(1493∼1528년)은 대과에 급제하여 숭문원·예문관·승정원에서 문한을 관장했다. 또한 1523년 비변사 낭관으로 서북면 야인(野人) 정벌에 공을 세웠다. 당상관에 올라 만포진첨절제사로 변방 수비에 힘쓰다가 야인에게 살해당했다. 이 해에 양천현 서쪽 개화산의 서북쪽 기슭에 동남향으로 자리 잡아 장사 지냈다.
심사순공(1496∼1531년)은 1517년(중종 1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가독서를 하고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1531년 김안로 일파가 꾸민 종루괘서사건에 연루되어 추국(推鞫:죄상을 다스리는 것)을 당하여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에 현 위치에 장사 지냈고, 1569년에 부인 이씨가 합장되었다. 묘갈문의 크기는 총 높이 218cm, 비 높이 120cm, 폭 59cm, 두께 20cm로 1579년에 세워졌다. 비문은 조카 판서 심수경이 짓고, 도사 심일취가 썼다.
심수경공(1516∼1599년)은 1546년(명종 1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대사헌·도승지·영중추부사와 무신직도 수행한 유장(儒將)이었다. 심정공의 손자이며 심사손공의 아들인 심수경공은 6조의 판서, 병마절도사, 한성판윤, 승정원, 도승지, 사간원, 우의정 등을 역임했다. 또한 조선청백리로서 임진왜란 당시 팔도의병대장으로 활약하는 등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신명을 바친 훌륭한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삼도체찰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했다.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여 직접 자신의 묘갈문을 짓고 후일에 고치지 말라고 유언했다. 부인 신씨와 쌍분으로 모셔져 있다. 묘갈문의 크기는 총 높이 295cm, 비 높이 175cm, 폭 75cm, 두께 23cm로 1601년에 세워졌다. 비문은 둘째 아들 심일취가 썼다. 1991년(12월 24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