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최상단으로 이동

변화로 만드는 미래 구민과 도약하는 강서 - 강서문화관광

검색영역

문화재

강서구에는 국가지정문화재 7개(보물5/사적1/등록문화제1)와 서울시 지정문화재 8개(유형문화재4, 시기념물2, 무형문화재1, 문화재자료1)로 총 15개가 있으며, 전통사찰, 정자 등 많은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는 전통 있는 도시입니다

허가바위

지정번호 서울시기념물 제11호
지정일자 1991년 12월 24일
관리자 강서구청장
시대 삼국시대 이전
  • 양천허씨의 발상지 

    허가바위는 탑산 아래 천연적인 바위동굴이다. 옛날 석기 시대 사람들이 한강가에서 조개와 물고기를 잡으며 이곳에서 살았으리라 짐작되는 혈거동굴로서 연구 가치가 매우 높다. 이 굴은 올림픽대로가 건설되면서 육지로 변했으며 현재는 영등포공고 정문 앞에 위치한다. 이 굴에서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이 태어났다는 설화가 있기 때문에 이 굴을 양천허씨의 발상지라고 부른다.

    양천지역의 지명은 삼한 시대부터 삼국 시대까지 ‘제차파의현(劑次巴衣縣)’으로 불렀다. ‘제차(劑次)’란 물가라는 뜻이다. ‘파의(巴衣)’는 바위를 가리키는 옛말이다. 이는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년) 때 공암현이라 변경되었다. 고려 충선왕 2년(1310년)에 비로소 양천이라는 지명으로 명명되었다. 그 뒤에 대한제국 고종 32년(1895년) 을미개혁 때 양천현에서 양천군이 되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인 1910년에 일본이 경기도 김포군을 양동면과 양서면으로 나누었다. 광복 이후, 서울시행정구획 확장에 따라 영등포구에 편입(1963년 1월 1월)되었다가 강서구에 편입(1977년 9월 1일)되었다. 강서구와 양천구가 분리되며 양천의 이름을 되찾았다(1988년 1월 1월). 그리고 강서구의 최초 지명은 “제사 드리는 바위”라는 의미를 지님으로써 이곳 허가바위로부터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굴의 크기는 가로 약 6m, 세로 약 2m, 길이 약 5m이며 사람들 10명 이상이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이다.

    양천허씨의 시조인 허선문은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하러 가면서 이곳을 통과할 때 도강(渡江)의 편의와 군량미 제공 등으로 공을 세워 공암촌주(孔巖村主)의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경기읍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양천허씨의 기록을 찾을 수 있다. “허선문은 나이가 90이 지났는데도 고려 태조를 섬겨서 견훤을 정벌하러 갈 때 군사들을 격려한 공이 크므로 공암촌주로 삼았다. 그리하여 그 자손이 공암허씨가 되었으며 공암은 양천이므로 공암허씨는 양천허씨를 말한다.” 그 후 양천허씨의 자손은 번창했으며 조선조 세조 때 북병사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허종, 『동의보감』을 저술한 의성 허준, 허옹, 허침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특히 구암(허준) 선생이 『동의보감』을 집필했고 생을 마치신 곳도 허가바위였다.

자료관리담당
문화체육과
문의전화
02-2600-6456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