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창동은 조선시대에 서해안의 염전으로부터 채취해 온 소금을 서울로 운반하는 소금배의 뱃길 어귀인 이곳에 소금보관창고(염창동103번지 근방)를 지었기 때문에 염창동(鹽倉洞)이란 동명(洞名)이 유래되었다. 염창에는 서해안과 남해안의 염전에서 만든 소금을 서해의 뱃길을 이용해서 한강하구까지 들여오는데 일단 한강하구에 진입하는 배는 마포근방까지도 가게되지만 소금의 경우는 자칫하면 물에 녹는 경우가 많았고 이곳이 소금을 보관하기에 좋은 장소였으므로 이곳에 소금을 부리고 다른 물품들은 마포까지 배로 운반되었다.
염창으로 운반된 소금은 국가용과 군사용, 그리고 일반판매용으로 구분되어 각각 저장 보관 하였는데 자염(煮鹽)으로만 제조되던 당시로서는 매우 귀한 물품으로서 전매품(專賣品)으로 지정취급되었다.
이에 암거래도 매우 성행하였다. 암거래와 투기, 운반도중 물에 녹아서 염전에서 출반한 소금의 양이 이곳 염창에 도착하면 심한 경우 1/50도 제대로 남지않아 염창에 소속된 관원은 물론 양천현(陽川縣)의 관리들까지도 곤욕을 치루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조선후기에는 양천현령이 염창을 딴 곳으로 이전해 줄 것을 자주 요청하였으며, 숙종때에 가서야 비로소 이곳의 염창이 폐지될 수 있었다.
이 곳에 운반된 소금이 많을 때에는 소금더미에서 「임금 용안을 볼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양이어서 창고 한군데 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자 상염창ㆍ중염창ㆍ하염창, 이렇게 3군데로 나누어 각각 보관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명칭은 예전에 염창동의 웃마을과 아랫마을을 일컬었던 말에서도 확인된다. 염창동은 한강가에 솟은 염창산의 산록에 홍수를 피하여 이전한 사람들로 마을을 형성하면서부터 발달되었다.
소금배가 다닐무렵의 염창동은 강물의 흐름이 급한데다가 물목이 좁아 모래가 자주 메워져 종종 여울목이 생겨났다.
이 때문에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조운선(국가 양곡을 운반하는 배)이 가금 침몰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만약에 미곡을 실은 배가 침몰하게되면 미곡은 이 부근에 사는 사람들이 건지게 되므로 이 여울목의 이름을 증미항(拯米項) 또는 염창항ㆍ염창여울목이라고도 불렀다. 쌀을 건진다는 뜻의 증미(拯米)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증미(增 味)로 와전되어 현재의 증미부락의 이름이 되었다. 증미부락은 다시 윗증미, 아랬증미로 나뉘어졌는데 각각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불려왔다. (염창동20번지일대의 증미부락은 아랫증미, 103번지 근방은 윗증미로 판단된다.)
지역특성
강서구 동단에 위치하고, 양천길이 중심 동서로 관통하고 있으며 동쪽에 안양천·영등포구, 서쪽에 가양3동·등촌1동, 남쪽에 공항로·양천구, 북쪽에 올림픽대로·한강과 연접한 지역으로 자연부락에서 공장지대로 발전하였고 중소공장·노후건물 부지의 활발한 재건축사업으로 급속한 인구 유입, 주민구성 및 생활수준이 다양화되고 공동주택이 계속 건축되고 있음.